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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 역사

부의 축적

by 맬랑꼴리아 2022. 8.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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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 자유

 

 

돈의 중요성은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돈없이 문명이 발달할 수 있다는 것은 생각하기 힘들다. 그래서 당신은 오래 전 선사시대에 어떤 천재가 돈을 발명했음에 틀림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당신은 틀렸다. 어떤 한 사람이 국가라는 조직체를 발명하지 않은 것처럼, 화폐가 아주 유용한 경제적 도구가 되리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수천년 전 우리의 조상들은 사람이 사는 사회에 대하여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들은 미래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이 생각하였다면 그것은 고작 다음 날에 대한 것이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류 최초의 돈의 목적과 형태에 대하여 설명하려고 할 때, 현재 우리의 사고방식을 적용해서는 안된다. 대신 우리는 원시인의 사고와 생활방식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고대에 사람들의 활동은 사냥과 식량채취에 제한되었을 것이다. 가족들은 완전 자급자족이었다. 심지어 소단위 기구들로 다른 가구들과 완전히 독립적으로 생을 영위하였다. 그들은 아무 것도 살 필요가 없었으므로 가치의 기준이나 교환의 수단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같은 초기 문명사회에는 동전은 커녕 금속도 알려지지 않았지만 교환의 기본조건과 화폐제도의 필요성은 잉태되고 있었다.

    자연과의 투쟁

 

아주 초기에 인류의 생활은 가족과 원시종족 중심이었다. 가족은 자녀를 돌보아야 하는 필요성 때문에 조직되었다. 또한 사람들은 야생동물과 호전적인 이웃의 종족들에 대항하기 위하여 부족을 형성하였다. 초기부터 여기에는 노동의 전문화가 있었다. 남자는 사냥을 하고 부족을 방위하였다. 여자는 어린이를  돌보고 대부분의 나머지 일을 하였다. 이런 식으로 집단의 필요성이 이루어졌다. 그들은 협력했고 완전히 자급자족이었다. 돈의 필요성은 없었다.
  

원시인은 돌로 무기나 조잡한 도구를 발명했고, 이것들은 생존과 작업의 용이함 때문에 만들어졌으므로 가치가 부여되었다고 역사는 가르친다. 그러나 이들에게 생존의 문제는 신의 손에 달려 있었고, 이들의 신은 수없이 많았다.
어떤 신은 물을 다스리고, 다른 신은 불을 다스리며, 또 다른 신은 사냥, 날씨, 전쟁 등을 지배한다고 그들은 믿었다. 일이 잘 안되면 신이 노했다고 생각했고, 만사형통하면 그 반대로 생각하였다.

    신의 제물

역사의 초기에 사람들은 제물을 바치고 예배를 드림으로써 신에게 은혜를 간구하는 관습을 만들었다. 바칠 것이 별로 없었으므로 원시인들은 가장  가치있는 것을 신에게 바쳤다.
  신의 은혜와 사람의 공물의 교환은 사업상의 거래라고는 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신은 돌도끼를 받고 물을 보내 주지는 않았다. 그리고 신에게 바쳐진 연장은 전혀 돈같은 것이 아니었다. 이것들은 단순히 유용한 물건일 뿐이었다.

 

이같은 원시의식은 원시인들이 자신의 소유물에 서로 다른 가치를 부여했다는 것을 증거하기 때문에 우리의 관심을 끈다. 땅에 굴러 다니는 돌은 제사의 희생물로 가치가 없다. 그러나 이 돌이 도끼로 바뀌면 가치가 있었다.
  

사람들 사이에 거래가 시작되었을 때 그 거래는 돈없이 이루어졌다. 이같은 거래는 물물교환이다. 하나의 유용한 물건이 다른 가치있는 물건과 교환되는 것이다. 그리고 물물교환이 시작되었을 때 교환되는 물건들은 창이나 도끼같이 유용한 것이었다. 이들은 한 때 신에게만 제공되었던 물건들이다.
  

물론 원시인들이 어떻게 거래를 수행하였는지 우리는 아는바가 없다. 그러나 거래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풍족한 물건보다 희소한 물건에 더 가치가 부여되는 적당한 척도가 틀림없이 있었음을 우리는 안다.
  

마찬가지로 한 물건의 가치는 그의 희소성과 유용성으로부터 유래되었다. 어떠한 화폐도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물건의 가치는 가격으로 전환될 수 없었다. 그러나 어떤 물건은 다른 물건보다 더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거래는 이루어질 수 있었다.

 



    부의 축적

수천년 전, 아마도 사람들이 물건에 가치를 부여하기 시작했을 무렵에,  사람들은 하루 하루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 이상으로 축적하도록 충동을 받았다. 사실, 축적은 화폐의 역사를 통하여 사람들 사이에 자연적인 본능이었던 것 같다.
초기의 축적은 무기와 연장의 형태였고, 나중에는 소나 기타 물건들이 추가되었다.
이들 축적물은 사용상에 가치있는 물건들로 구성되었다. 어떤 면에서 이것들은 오늘날 '만일을 대비한 저축'과 같았다. 그 당시에는 신에게 희생물을 바치는 것이 아직 보편적인 만큼, 희생물을 바치는 자는 신으로부터 축복을 의심치  않았다. 좌우간 축적은 아주 옛날에도 오늘날처럼 우월과 지위의 징표가 되었다.
  

우리는 고대의 관습이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말에 어떻게 영향을 남겼는지, 그것을 몇 개의 단어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자본(capital)'이라는 말은 라틴어의 '머리' 또는 '소의 머리'를 의미하는 'caput'라는 단어에서 유래되었다. 현재 인도의 동전의 이름인 '루피(rupee)'는 인도어의 '소떼'를 의미하는 'rupa'라는 단어에서 유래되었다.
  

세계 도처에 흩어진 문명은 거의 같은 방식과 같은 목적 하에 물건을 축적하였다. 그러나 축적한 물건의 종류는 같지 않았다. 그리스에서는 청동의 세발솥과 대야가 축적되었고, 크레타와 이태리에서는 청동의 도끼가 축적되었다.
중국에서는 청동의 칼과 반지가 선택되었다. 그밖의 세계에서는 진주와 조개껍질 등이 모아졌다. 이같은 축적물을 소유자가 몸에 치장함으로써 모두에게 과시하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들 축적물은 경제적으로 거의 의미가 없었다. 이것들은 거래에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들은 화폐의 기능으로 발전하는 기미를 보여 준다.
  

사람들은 예를 들어서 창보다 말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을 알게 되면서 가치의 개념을 느끼게 되었다. 가치에 대한 느낌은 거래가 확대되면서 매우 중요하게 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물건을 축적하기 시작하였다. 가치의 저장수단으로써 화폐의 기능을 다양한 물건이 해냈다. 그러나 대부분의 비장된 물건들은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은 매일의 생을 영위하는데 유용하게 사용된다는 점이다.
축적된 물건들은 사용가치가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이들은 또한 교환가치도 생겼다. 즉 저장된 물건의 가치는 그들의 용도뿐만 아니라 그들과 교환되는 다른 물건의 용도로 인식될 수 있었다.
  

이 단계에서 우리는 심지어 초기사회도 오늘날의 사회에서 발견할 수 있는 특성을 많이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고대의 생활은 불안하였다. 사람들은 열심히 일해야만 하였고, 단순히 생존하기 위해서 재능을 발휘해야만 하였다. 경험은 그들에게 만일에 대비하여 자신들과 신을 위하여 필요한 물건들을 축적하도록 가르쳤다. 그리고 인류 역사의 초기부터 사회적 지위와 인정을 위하여 서로 경쟁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러나 여기에는 아직 완전히 드러내지 않은 인간의 다른 면모가 있다. 인간은 현재에 대하여 결코 만족하지 않는 아주 묘한 피조물로 알려져 있다. 인간은 새로운 것을 시도하기 원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이 갖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원하고, 따라서 교환하고 싶은 강한 성향을 갖고 있다.
 아래에서 우리는 이같은 인간의 면모가 어떻게 화폐의 필요성을 일으켜 궁극적으로 다분히 우발적이지만 화폐를 창조하였는가를 볼 것이다.
문명이 발달되면서 인간은 서서히 자급자족 씨족단위의 단순한 생존수준에서 벗어나기 시작하였다. 약 2만년 전 신석기 시대에 인간은 더 세분화된 노동의 전문화의 길로 들어섰다. 각 개인은 사냥, 목축, 연장 제작, 또는 그릇 제작과
같은 특별한 길에 전문적으로 종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모든 시간을 하나의 기술에 바치면서 개인은 독립성을 잃었다. 도공이 도기를 자신이 필요한 수량 이상으로 만들면, 그는 자신과 가족들에게 필요한 다른 물건들을 만들지 못한다. 그는 자신이 필요한 다른 물건들을 얻기 위하여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여야 한다.
  

종족 또한 전문화되기 시작하였다. 장소에 따라 다른 조건 때문이었다. 한 종족은 좋은 돌을 갖고 있지만 소금이 없을 수 있다. 반면, 다른 종족은 소금은 얼마든지 있겠지만 무기와 연장을 만드는 좋은 돌이 없을 수 있다. 또 다른 종족은 도기에 필요한 훌륭한 찰흙이 있는 반면에, 이와 다른 종족은 찰흙은 없지만 보석이 있을 수 있다. 물론 모든 종족은 그들의 조상이 수세기 동안 그것 없이도 생존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종족이 갖고 있는 것을 갖고 싶어 한다. 그러므로 부족한 물건과 재료를 남는 물건과 바꾸려는 성향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거래는 이렇게 하여 시작되었다.
  

전에는 신에게 바치려고, 혹은 사회적 지위를 표하기 위하여 쌓았던 물건들도 이제 가치를 얻었다. 왜냐하면 바라는 물건과 교환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디에서 어떻게 교환을 하는가 하는 문제가 남았다.

    물물교환의 문제

물물교환은 수행되기 어려웠다. 사람들은 서로 의심하였다. 친구보다는 적이 되기 쉬웠다. 가장 쉬운 교환은 아마도 호혜의 형태였을 것이다. 오늘날 어린이들은 이 방식을 따른다.
  

"내가 너에게 공을 주면, 너는 나에게 무엇을 줄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그들의 첫번째 거래를 경험한다. 물건의 실제가치는 별로 관계없다. 많은 어린이들은 새장난감을 지렁이와 바꾸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을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원시인들은 아마도 이처럼 행동하였을 것이다. 새 물건의 가치에 대한 그의 판단기준은 그가 그것을 얼마나 원하는지와, 그것을 위하여 무엇을 포기할 수 있는가였다.
  

원시인들은 그의 마을에서는 이같은 거래를 훌륭히 해낼 수 있었다. 그의 종족이 돌로 전문화되었다면 그는 화살촉을 만드는 시간보다 돌도끼를 만드는 시간이 두 배로 길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돌도끼 하나를 화살촉 두 개와 교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종족은 질그릇을 만들지 않으므로 질그릇 하나를 얻기 위하여 몇 개의 화살촉이 필요한지 알 수 없었다.
  

질그릇의 제작자도 물론 마찬가지 입장이다. 각 거래자는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쌍방은 상대의 물건의 가치를 평가하는데 필요한 기준을 결핍하고 있었다. 쌍방은 합의가 이루어지는 시장의 유용성에 대한 지식도 결핍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지식과 시장이 없는 거래는 단지 어린이의 교환 정도에 머물 수 밖에 없었다.
  

기원전 490년에서 기원전 424년까지 살았던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Herodotus)는 원시형태의 교환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상선을 타지에 정박시키고 상인은 상륙한다. 그들은 물건을 진열한 다음 우호의 뜻을 표시하는 것으로 그 자리를 물러난다. 후에 원주민들이 나타나서  자신들의 물건을 늘어 놓고 상대방을 놀라게 하지 않기 위하여 사라진다. 그러면 
사인은 다시 돌아와서 상대방의 물건을 조사한다. 만족하지 않으면 자신의  물건의 일부를 갖고 사라진다. 새로운 흥정을 의미한다. 이같은 흥정은 쌍방의  제안의 균형이 이루어지고, 모두가 만족할 때까지 계속된다. 그러면 거래는 
끝난다. 이것은 아마 성가신 과정이겠지만, 여기에는 최소한 교환의 개념이 있다.

    물물교환의 불편함

종족 사이의 물물교환은 상품의 교환을 가능하게 하였지만 온갖 불편함이 따랐다. 자신이 갖고 있는 네 마리의 염소를 소 한 마리와 바꾸기를 원하는 사람은 소 한 마리를 네 마리의 염소와 교환하기를 바라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오래 돌아다녀야 한다. 염소를 돼지, 벽돌, 포도주, 혹은 도끼와 바꾸는 것은  쉬울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그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한 마리의 소가  필요하다. 소의 임자가 염소를 받아만 준다면 일은 쉬울 것이다. 그러나 소의 임자는 양가죽을 원한다.
  

물물교환에는 다른 어려움도 있었다. 사람들이 바꾸기를 원하는 대부분의  상품들은 내구재도 아니고 운송하기 쉬운 것도 아니었다. 사람들은 염소의 가치를 손상하지 않고 오랫동안 염소를 들고 다닐 수 없었다. 그리고 부피가 큰 상품은 소액의 교환을 위하여 분할할 수도 없었다. 조그마한 질그릇 하나를 얻기 위하여 소를 죽이지 않고 여러 조각으로 나눌 수 없었다. 그렇게 할 수 있다 하여도 나머지 조각이 과연 다른 상품과 교환될 수 있을는지 알 수 없었다.

    교환수단의 발달

거래가 좀더 쉬워지려면 그것은 두 단계로 나누어져야 했다. 네 마리의 염소를 한 마리의 소와 바꾸려는 사람은 정확하게 반대의 거래를 원하는 상대방을 만날  때까지 돌아 다니지 않아도 된다. 대신 그는 염소를 누구든지 받아 주는 표준가치의 상품과 바꾸면 된다. 그리고 이번에는 이 표준상품으로 소를 살 수 있다.
연장, 장신구, 금속막대, 반지가 서서히 표준상품으로 받아 들이게 되었다. 약 5천년 전 청동시대의 유적에서 이같은 물건들이 무수히 발견되었다. 이와 같은 수단으로 교환이 보편화되었을 것이라는 점을 증명하고 있다. 각 문명은 서로 상이한 교환수단을 발달시켰지만 그 목적은 모두 동일하다.
  

스코틀랜드 북서쪽의 헤브리디즈 열도에서는 멍석이 화폐의 형태가 되었다. 태평양의 캐롤라인 군도에서는 구멍 뚫린 돌바퀴가 화폐가 되었다. 알라스카의 생선, 멕시코의 코코아씨, 인도의 쌀, 이집트의 벽돌, 몽골의 차가 돈이었다.
  

이같은 물건들은 모두 거래를 편리하게 하였으므로 교환의 매개체로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현대의 화폐와는 달리 이들은 공통적으로 모두 유용한 것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예로써 쌀은 옛날에도 지금도 인도에서는 중요한 식량이다.
벽돌은 건축에 사용되었다.

이같이 다양한 교환의 매개체는 거래에 사용하기에 알맞는 특성이 있었다. 이것들은 대부분이 내구재였으므로 저장될 수 있었다. 예로써 차는 냄새나 촉감으로 말린 포도잎과 구별될 수 있었다. 이들 매개체의 어떤 것들은 다양한 수량으로 거래될 수 있었다. 한 주먹의 찻잎과 질그릇 하나가 교환될 수 있었고, 한 푸대의 찻잎은 도끼 하나 또는 한 마리의 작은 짐승과 거래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차나 벽돌 혹은 매개체는 무엇이든지 그것의 품질을 조사할 수 있는 사실 이외에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만드는데 얼마만큼 노력이 요구되었는가를 알기 때문에 그 가치를 평가할 수 있었다. 그래서 누구든지 차 한 푸대는 자연석 한 조각보다 더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고대에 어느 곳에서든지 통용되었던 화폐는 자패껍질(cowrieshell)이었다. 이것은 낚시바늘, 바늘, 칼날 제작에 적당하였다. 이 조개껍질로 꿴 줄 또한 장신구로 수요가 대단하였다. 이 조개껍질은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의 전역에서 발견된다. 이 조개껍질은 오늘날 달러에 해당하였다. 가장 널리 유통되고, 쉽게 교환되고, 가장 안정한 가치를 지녔다.
  

고대사회에서 거래를 용이하게 해 준 물건들은 그렇게 효율적이지는 않지만 현대 화폐의 대부분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이것들은 거래에 사용되었다. 교환의 매개수단이었다. 저장될 수 있었다. 가치의 저장수단이었다. 대금지불로 받아졌다. 가치의 척도였다. 그리고 일부 어떤 것들은, 예를 들면 쌀 같은 것은 가치를 손상함이 없이 소량으로 분할될 수 있었다. 소위 교환의 매개수단의 분할성이었다.
   이렇게 하여 네 마리의 염소를 한 마리의 소와 바꾸려고 사방으로 돌아 다니던 때 이래로 인류는 오랜 세월을 보내왔다.

    청동과 경제혁명

 방금 고찰한 신석기 시대에 모든 원시종족의 생활수준은 비슷하였다. 이 시대는 기원전 약 1만년에서 기원전 3천년에 걸친다. 이 시기에 인간의 생활은 크게 개선되었다. 인간은 연장을 만들 줄 알고, 씨를 뿌릴 줄 알고, 가축을 기를 줄 알고, 질그릇을 만들 줄 알게 되었다. 서로 교역도 시작하게 되었고, 이것이 최초의 화폐사용을 불러 일으켰다.
  물론 원시인은 바로 이웃 종족밖에 알지 못하였다. 예를 들어 고대 중국인은 다른 곳에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조차 못하였다. 다른 종족과 한번도 만난 적이 없기 때문에 원시 중국인은 그들이 경험을 통하여 알고 있던 지식을 가령 아프리카인과 나눌 수 없었다. 그런데도 세계의 도처에서 화폐의 출현은 자급자족의 노동의 거쳐 물물교환으로부터 교환의 매개수단의 등장에 이르기까지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동과 주석을 합금함으로써 단단한 청동을 만들어 냈다. 이 발견은 청동기시대의 문을 열었다. 이 시대는 기원전 3천년에서 기원전 1천년에 이른다. 청동은 교역의 발달을 상상할 수 없이 촉진하였다. 그리고 청동은 많은 변화를 불러 일으키고 기술혁신을 뜻하였으므로, 청동의 보유는 사회 존속에 절대로 필요한 것이 되었다.
  

석기시대에 인간은 단지 자신의 잉여물은 교환하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그러나 청동의 발견으로 부족들은 필요불가결한 청동과 바꾸기 위하여 자신들이 잉여물을 더욱 축적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실 청동으로 무기를 만들 수 있었으므로 종족간에 청동에 대한 경쟁은 어떤 면에서 오늘날의  핵무기 경쟁과 비슷하였다.
  

청동은 이 시대에 지불수단으로 보편화되었다. 청동은 막대형태로 저장될 수 있었다. 그것은 분할될 수 있었고, 연장, 무기, 장신구에 대한 원료로써 누구나 필요하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인간이 경화를 주조하기 시작하였을 때, 그들은 청동을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금과 은이 사용된 것이다.

    화폐와 마술

 이에 대한 설명은 고대종교로 거슬러 간다. 특히 중동지역에서 성행하였던 점성술까지 거슬러 간다. 예수 탄생 3천년 이상 전에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강 사이에 비옥한 땅에서 한 도시문명이 일어났다. 지중해와 페르시아만까지 확장된 이 제국은 약 3천년간 계속되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그 영향이 이집트와 그리스까지 미쳤다. 이 문명은 천문학과 점성술이 자랑이다. 별을 더 가까이 관측하기 위하여 엄청난 탑을 쌓고, 그것을 관측소로 이용하였다. 바벨탑도 아마 그같은 관측소의 하나였을 것이다. 바빌로니아의 승려들은 금과 해, 은과 달 사이의 신비로운 관계를 가르쳤다. 금은 성스러운 태양과 관계가 있고, 은은 달과 관계가 있다고 그들은 말했다. 금과 은에는 신성이 있다고 가르쳤다.
  

승려에 의해서 신성이 부여되었고, 그들의 바빌로니아 제국이 고대의 강력한 국가였으므로 금과 은이 볼편적 지불수단이 되었다고 어떤 학자들은 결론짓는다.  바빌로니아 제국의 강력함 때문이라는 후자의 이유가 더 신빙성이 있다.
 바빌로니아의 승려들은 대단한 수학자였다. 그들은 항성의 운행을 관찰하고 예측하였다. 그리고 금과 은의 교환비를 1대 13.5의 비율로 고정시켰는데, 이것은 양력의 1년에 대한 음력 월수의 비율이다. 그러나 금과 은으로 주화를 만든 것은 바빌로니아인이 아니었다. 당시 바빌로니아인들은 소액의 지불이 필요할 때에는 금이나 은 막대에서 해당 양을 잘라 냈다. 바빌로니아인들은 기본적인 중량 단위로써 밀 한 알의 무게(0.0648g)를 사용하였는데, 이것은 아직도 금 세공인에 의해서 사용되고 있다.
  

금은 오늘날도 잘 통용되지 않는다. 바빌로니아에서도 금은 거의 유통되지 않았다. 그들은 금을 사원에 쌓아 놓고 이방인과 거래할 때에만 사용하였다. 마치 오늘날 금이 중앙은행의 금고 속에 잘 보관되어 국제결제에만 사용하는
것과 같다.
  지금도 볼 수 있는 이집트의 한 사원의 벽화에 새겨진 글은 큰 '공물'이 바쳐진다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이집트의 수출품이 금으로 결제되고 있는 장면이라는 것이 더 그럴듯하다. 그 증거로써 고대 중동의 국가였던 미타니의 투쉬라타 왕이 기원전 13세기에 파라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미타니에게 대금이 금으로 지불되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금은 사원에 안전하게 보관되었고, 이와 함께 금과 은이 가치를 재던 표준저울추도 보관되었다. 바빌로니아의 저울추는 오리 모양이었다. 
이집트의 추는 소머리 모양이었는데, 이것은 이전의 가치기준이 소였다는 사실을 증거한다.
  

바빌로니아가 채택하였던 관행 가운데 아직도 어떤 화폐에 적용되는 것이 있다. 승려는 금과 은의 가치를 정하면서 계산의 12진법을 채택하였다. 사람의 손가락이 10개이므로 10진법의 사용이 훨씬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12진법을 선택하였다. 그 까닭은 12라는 수가 성스러운 수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태양이 매년 통과하는 12궁도의 수였다. 이 계산법은 최근까지 영국 통화에 적용되었다. 영국도 지금은 10진법으로 바꾸고 있다.
고대 바빌로니아는 대내, 대외무역이 번창하였고, 확립된 법제도가 있었고, 사회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안전하게 지키는 승려계급이 있었던 융성한 제국이었다. 이 조건들은 화폐제도가 발달하는 선행조건이었다.

 

당시 제국의 사원은 경제의 중심지였다. 승려가 사업상의 계약을 마련해 주고 증인 노릇을 하였고, 모든 거래를 진흙서판에 기록하였다. 수천의 진흙서판은 후에 발견되어 상업이 얼마나 발달되었는지를 말해 주고 있다.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승려는 저축성 예금을 취급하였고, 이것 역시 기록되었다.
  

은행제도가 발달하기 시작했으므로 사람들은 노예를 사거나 빚을 같을 때 더 이상 돈을 갖고 다닐 필요가 없게 되었다. 사람들의 저축이 소 한 마리가 끌만한 무게의 금속으로 구성된 것을 생각할 때 이것은 대단한 구원이었다. 돈은 대단히 무거웠다. 기원전 약 2천년에 미네케의 1탈렌트는 그 무게가 최소한 50파운드였다. 바빌로니아인들이 그들의 돈을 사원은행에 예치했을 때 승려는 그에게 신용장을 주었는데, 이 신용장은 어느 사원은행의 지점에서도 현금화될 수 있었고, 사원은행에 빚이 있는 제3자에게서 현금화될 수 있었다. 유럽은 중세기에 비로소 이같은 환어음과 수표제도를 발상하였다.
  현금없는 최초의 발명은 바빌로니아인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얼마 있지 않아  바빌로니아의 승려들은 은행업무의 경쟁을 보게 된다. 교역이 발달되면서 사설은행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2대 은행이 있었다. 시파(Sippar)와 이기비
(Igibi)은행과 니푸(Nippur)의 무라추(Muraschu)은행이다. 이 두 은행은 종래에는 농민에게까지 적당한 이자율로 신용을 공여하게끔 발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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